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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政의 어머니’예산 정정화 선생의 독립의 꿈

기사입력 2019.08.15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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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臨政의 어머니 예산 정정화 선생의 독립의 꿈

     

     

     

    정 선생, 20세 꽃다운 나이로 상해 망명

    여섯 번 본국 드나들며 독립자금 날라

    46년 동안 독립운동에만 열정 불살라 

     

     

     

    내가 임시 망명정부에 가담해서 항일투사들과 생사 존몰(存沒)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사사로운 일에서 비롯됐다. 다만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마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른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나를 알고 지내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치켜세우는 것은 오로지 나의 그런 재주 없음을 사 주는 까닭에서 일 것이다.<정정화 선생 회고록 녹두꽃서문>  


    20세 꽃다운 나이에 상해 망명길 올라

    독립운동은 자신의 처지에서 잠재능력을  발휘해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쟁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독립운동은 남자만의 전유물도 아니지만 반드시 총칼로만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독립운동가 정정화(鄭靖和, 1900.8.31991.11.2) 선생은 충남 예산군 대술면 시산리가 고향이다. 수원 유수(水原 留守)를 지낸 부친 정주영과 이인화 사이의 24녀 가운데 셋째 딸로 19008월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열한 살이 되던 1910년 동갑나기 신랑 김의한과 혼인하면서 선생은 세상 물정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914년 매동보통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운 뒤 1917년 중동학교에서 수학하고 있었던 신랑 김의한으로부터 세계 1차대전 종전과 더불어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얻고 있는 때에 우리나라도 그런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등의 국제정세를 알게 되면서 스스로 민족의식을 깨우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정 선생은 19193·1운동 발발을 기화로 그 이듬해인 19201월 서울역에서 의주행 열차를 타고 상해로 망명길에 오르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 변신해갔다.  


    27년간 독립자금 모집·연락책 맡아

     당시 힘 있는 자는 힘으로, 돈 있는 자는 돈으로, 정성이 있는 자는 정성으로라는 슬로건이 독립 운동가들의 마음 속에 새겨지면서 독립운동이 상해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유관순 열사가 감옥에서도 독립만세를 절규하다 쓰러졌다면, 정정화 선생의 독립운동 방식은 뒤에서 말없이 정성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정 선생은 상해 망명 이후 본국으로부터 독립자금을 모집해 전달하느라 서슬이 시퍼렇던 일경의 눈을 피해 무려 여섯 번이나 본국을 드나들며 자금을 날랐다.  

    망명한지 보름 남짓해 정 선생은 첫 번째 임무를 띠고 이미 망명해 있던 시아버지 김가진의 지시에 따라 서울에 잠입해 20일 가량 머물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한 뒤 그 해 4월 초 상해로 귀환함으로써 첫 번째 독립운동자금 조달 임무를 완수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게 됐다.  

     

    인력거 타고 압록강 건너다 일경에 체포

     정 선생은 1921년에 친정집으로부터 독립자금을 모집하는 두 번째 임무를 완수하고 그 이듬해인 19226월 중순 세 번째로 국내잠입 밀명을 받고 상해에서 배편으로 청도를 거쳐 인력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다 일경에 체포돼 신의주경찰서 끌려가 심문을 받는 중에 신분이 탄로나 서울 종로경찰서까지 압송되는 등 잠시 고초가 있었으나 큰 문제없이 곧 풀려났다.

    정 선생은 그 후 세 차례나 더 국내를 드나들면서 친정집인 예산 등지에서 독립자금을 모집해 꾸준하게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해왔었으나 망명정부의 내부 문제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정 선생이 사실상 망명정부의 안주인으로서 임정 요인들의 수발을 들어두면서 안정을 찾는데 상당한 역할을 해냈다.  

     

    여장부 출가 생불환(女丈夫 出家 生不還)

    정정화 선생이 서른 살 되던 해인 19297월 망명길에 오른 후 여섯 번째로 고국 땅을 밟고 16개월 동안 국내에 체류다가 1931년 다시 상해로 망명하면서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집을 떠날 때 장부 출가 생불환(丈夫 出家 生不還)이라는 말을 남긴 것처럼 독립이 되기 전에는 귀국하지 않겠다며 자신의 독립운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밝히기도 했다.  

    1945815일 마침내 광복을 맞이한 정정화 선생은 임정요인들이 115일과 121일 등 두 차례에 걸쳐 환국한 후에도 투차오(土橋)에 남아 뒷정리를 말끔하게 마친 후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상하이를 거쳐 미군수송선을 타고 부산을 통해 귀국했다.  

    정 선생은 46년 동안이라는 결코 짧지 않았던 시간을 오직 독립운동에만 열정을 쏟아내며 후회 없는 삶을 살아온 신여성으로 우리들의 역사 속에 영원히 남아있다.  

    정정화 선생은 독립유공자로서 1982년 대통령 포장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고, 9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국립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소에서 영면에 들었다.

     

    skcy21@ccnewslan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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